[자작나무 숲]’2년 후 결혼하자’ – 김진영(연세대 노아노문학과 교수) –

중학교를 자퇴한 뒤 공장 등 전전하던 러시아 시인 브로드스키의 서정시 후렴구의 세상이 아무리 나빠져도 사랑은 굴복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다짐 소련 체제로 ‘사회의 기생충’ 죄명으로 추방된 뒤 1987년 노벨문학상

일러스트=이철원(Iosif Brodsky19401996).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이 시인의 이야기를 꼭 한번 하고 싶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중학교 중퇴 후 공장, 시체보관소, 선박 보일러실, 지질탐사 현장을 전전하며 시를 썼다.

대학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혁명작가 막심 고리키 표현대로라면 그에게는 길거리의 삶이 곧 ‘대학’이었다.

아니 길 아래 인생이 바로 대학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

스탈린에 이어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에 ‘해빙기’가 도래했다.

비공식적으로 비틀즈 음악이 들어오고 서구 문학이 유통되면서 폭넓은 청바지와 장발이 유행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브로드스키가 속해 있던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돼 언제든 체포와 유형의 빌미가 됐다.

당국이 표방한 해빙의 자유란 체제를 선전하고 합리화하는 장치일 뿐 억압과 탄압은 여전해 누구도 내일의 안위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이 많았다.

청년 브로드스키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사람이다.

3차례 체포와 정신병원에 감금, 북극 강제노동형을 거쳐 영구 추방됐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적절한 이별의식도 없이 무작정 빈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실린 시인의 여행가방에는 타자기와 보드카 2편, 그리고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의 시집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돌아갈 수 없는 귀양길을 함께한 그 가방과 모자가 지금은 페테르부르크 아흐마토바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한 용감한 유대계 여성 덕분에 1964년 브로드스키 재판의 전모는 현장에서 기록돼 전 세계로 확산됐다.

죄명은 ‘사회의 기생충’.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기생충’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인데 당시 소련에서 그 단어는 반소련 ‘인민의 적’을 의미했다.

심문은 정해진 프레임에 따른 것이었다.

판사: 할 일은?피고 : 시를 써서 번역할 것 같아요.판사: 당신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직업은 무엇인가? 피고: 시인. 시인 – 번역가.판사: 누가 당신을 시인이라고 인정했어? 누가 당신을 시인으로 분류했는가?피고 : 아무도. 누가 나를 인간으로 분류했을까.

시인이 되려고 무슨 교육을 받았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교육 문제가 아니다.

신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의 재판 노트를 읽는 것은 부조리극을 관람하는 것과 같다.

인생 자체가 한 편인 연극 일진대, 브로드스키는 패배 앞에서 승리를, 모멸 앞에서 존엄을 일관되게 연기한 뛰어난 배우였다.

어느 순간에도 짓밟혀 쓰러지지 않고 솟아오른 그의 힘은 바로 서정의 원동력, 즉 아름다움의 날개짓이었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시인이 말하기를 예술은 사회적 동물(인간)을 자율적 자아로 격상시키고 개인의 미적 경험은 그의 윤리적 선택을 방향짓는다.

아름다움을 경험할수록, 그리고 확고한 취향을 가질수록 도덕적으로 더 민감하고 사적으로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오염되기 어렵고,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사람은 추함의 늪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는 도스토옙스키 명제의 진의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논증 경로를 뒤집고 생각해 보면 자신의 위엄을 잃지 않는 것, 사회적 동물의 집단 본능과는 거리를 두는 것, 지금 이 너머를 볼 수 있는 것, 실재의 도구(언어, 행동 거지, 눈빛 같은)를 순화해 존재의 순간순간을 더럽히지 않는 것, 뭐 그런 것이다.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 시절 브로드스키는 서정시라는 제목의 연애시를 썼다.

2년후/아카시아는 시들고/주가는 떨어질것이다/세금도 오르고있을것이다.

/2년후/방사능은 더 늘어날것이다.

[…]/2년후/내목은 부러지고/팔도 부러지고/얼굴도 산산조각 났겠지./2년후/우리 결혼하자./ 2년 후 / 2년 후

왜 하필이면 2년 뒤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2년 후 우리 결혼하자.” 당장 내일의 과제도, 그렇다고 먼 미래의 막연한 꿈도 아닌 이 약속은 연인을 향한 프러포즈 이상의 자기 약속이다.

외적 현실에 역행하는 내적 현실의 완고한 후렴구라 할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나빠져도 사랑은 굴복하지 않고 결국은 해피엔딩의 대단원에 이를 것이다.

출구 없는 소련 사회의 틈새에서 19세의 젊은 시인이 그토록 아름다운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단 하나뿐인 사생활 각본을 쓰면서 어느새 세상의 모든 험악한 각본을 밀어내고 있었다.

– 조선일보 (2022.07.05) –